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강성호 지음
책세상 2003.09.10
평점

인상깊은 구절
포스트모던 역사학의 입장에서 한국의 '일상적 파시즘'을 비판하는 주장도 이와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먼저 극복되어야 하는 것으로는 일상 생활에서 발견되는 가부장적 권위주의와 비민주적 관습의 폐해가 꼽힌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적 파시즘'을 극복한다고 해서 더 큰 '구조적 파시즘'이 해결될 수 있는가? 또한 '일상적 파시즘'을 극복하는 것이 현 시기에 집중해야 할 주요 과제인가의 문제도 여전히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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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이 번지면서 한국의 역사학 또한 그 충격파에 시달려야 했다.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은 갑자기 낡은 시대의 유산이 되어버렸고, 학계의 모든 영역을 ‘아직도 마르크스를 말하는가’하는 냉소적인 목소리가 지배했다. 한때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차지했던 빈 자리를 빠르게 포스트모던 역사학이 채워나갔다.

강성호 선생의 문제 의식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 성과와 한계, 그리고 그 후의 새로운 모색을 점검하면서, 여전히 우리에게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필요하며, 오히려 이것이 21세기의 불확실성과 신자유주의에 대처하기 위한 무기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역사학이 실천적 대안을 제시해 주지 못하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거대담론으로 환원시켜 버렸던 다양한 하위주체들의 목소리들에 대해 주목해, 역사의 지평을 넓힌 점에 대해서는 정당한 평가를 내려 주어야 한다.

이 책의 미덕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어떤 부분을 수용하여 새롭게 면모해야 하는가에 대한 부분을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극복해야 할 것으로서의 스탈린주의에 대한 평가가 올바른가 하는 점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강성호 선생과 캘리니코스는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이 곧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은 아니며, 다만 스탈린주의의 몰락을 뜻할 뿐이라고 하지만, 이와 같은 생각은 도마뱀 꼬리 자르기를 연상시킨다. 스탈린이라는 타자他者를 만들어내고,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결함 또는 당시 전세계 공산주의자들 모두가 가질 수밖에 없었던 실천적 오류들을 모두 스탈린에게 전가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학자에 따라서는 스탈린주의의 근원을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사상을 오해하고 왜곡시킨 데에서 찾는 경우도 있다.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저작을 정리하고 출간하는 과정에서 임의로 내용을 수정․삭제함으로써 마르크스의 진의가 왜곡되어 전해졌다는 것이다. 마치 교회가 예수의 참된 뜻을 왜곡하였으므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듣는 것같다. 물론 여기서 스탈린을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스탈린주의 자체는 객관적 실재였으며, 그것이 마르크스주의를 일정하게 왜곡시킨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모든 것이 스탈린만의 오류는 아니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현실 적용의 실패는 스탈린의 작품인 것처럼 말하는 경향이 있는데, 마르크스가 이 부분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차라리 아나키스트들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문제를 가지고 스탈린을 비판한다면 몰라도, 적어도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이 그럴 순 없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에 대한 평가 또한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이 책에서는 세계체제론이 핵심부와 주변부 사이의 발전의 질적 차이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여 서구 중심주의 시각에서 벗어났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 또한 서구 중심주의의 다른 일면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은 영국의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공산품이 중국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없었던 이유를, 그리하여 마침내 영국이 아편 무역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통해서만이 대중국 무역 적자를 겨우 반전시킬 수 있었던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세계체제론은 논리의 전개 과정 속에서 서구만이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한 점 의심도 없이 전제로 깔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스탈린에 대한 평가나 세계체제론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새로운 모색의 의의가 없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러한 견해 차이 또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논쟁을 통해 고쳐가야 할 오류가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터이고, 이러한 과정 자체가 새로운 모색의 일부가 될 것이다.

포스트모던 역사학 또한 거시적 관점의 필요성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미시사와 거시사의 분업을 굳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이미 미시사의 사료 분석 틀 속에 거시적 관점이 녹아있다는 것은 비단 독자뿐만 아니라 미시사 역사가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역사가가 고양이 학살이라는 사건 속에서 직조공과 부르주아의 긴장 관계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거시적 관점이라는 기초의 전제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두꺼운 묘사’라는 개념 속에 이미 ‘치밀한 묘사’를 넘어서는 거시적 관점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강성호 선생이 맺음말에서 말하듯이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은 기존의 사회사, 미시사, 신문화사에서 제기된 연구 성과들을 적극 수용하여야 하며, 그동안 계급이나 민족의 개념 아래에서 소외되었던 다양한 역사 주체들을 복원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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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겨울에 과제로 썼던 글인데, 지금 다시 읽어 보니 정말 맘에 안 들지만, 이 또한 내 개인의 역사가 아니겠나. 그리하여 순전히 보관의 목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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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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