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리면 하고 싶은 게 있는가. 나는 길을 떠나고 싶다.

이번에 눈이 제법 많이 내렸다.
겨울철에 눈 구경 하기 힘든 부산에서는 이때가 특별한 날이다. 해저문 저녁 시간 이후로 바깥 출입을 금하는 비교적 엄격한 가정에서도 눈 오는 날 만큼은 예외가 적용되어, 밤 10시 이후에도 창문 밖에서 'OO야 눈 온다! 나와라!' 라는 아이들의 부름에 들떠 골목으로 뛰어나갈라 치면, "옷 두껍게 입어라. 너무 늦게 들어오진 마라..." 정도의 훈계가 보통이다. 내리는 즉시 녹아 버리는 게 보통이라, 이렇게 쌓일 정도로 눈이 오는 밤이면 눈싸움에, 눈사람에 세상은 온통 아이들의 것이다. 이젠 막히는 출퇴근길이나 눅눅해지는 옷가지, 염화칼슘 등의 무드 없는 일상으로 인해 예전과는 많이 퇴색되긴 했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눈 오는 날의 로망은 살아 있다.

언제부터인가 눈 내리는 밤엔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뭔가 모험이 시작되어야 할 것 같다. 하루하루 똑같은 일상 속에서 평범하다 못해 지루하기 짝이 없는, 그래서 한편으론 평온한 삶을 살다가, 어느날 누군가의 갑작스런 방문으로 인해 생각지도 않았던 커다란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그런 모험 말이다.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순전히 '파이널 판타지 VI' 이후인 것 같다. 눈보라를 헤치며 광산 도시 나르셰로 걸어가는 세 사람의 인트로 화면은 단순한 감동을 넘어, 이제부터 시작되는 험난한 모험의 시작을 알리는 매개로서의 역할을 멋지게 해낸다.


파이널 판타지 VI의 인트로

예측 가능한 일상의 수레바퀴를 도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이렇게 NPC처럼 살다가 늙어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을 것이다. 대사 몇 마디 없이 마을 안에서만 돌아다니는 NPC...
한번쯤 주인공이 되어 보고 싶은 사람이 없겠는가. 우리가 사는 마을에선 모든 것이 평화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세계의 안녕이 위협받고 있으며, 이 파멸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내 자신이라면 하는 생각 말이다. 나 없으면 세상이 백척간두에 서 있는 것이다. 현실에선 나 하나 죽어도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못 끼치지만, 게임 속에서처럼 내가 잘 못 되기라도 하면 바로 '게임오버'되는 그런 상황 말이다.

파이널 판타지 택틱스 어드밴스의 오프닝에서도 눈이 내린다.

근데 참으로 재밌는 것은 그렇게 모험을 떠나자마자 바로 그 지루하기 이를 데 없는 일상이 다시 그리워진다는 것이다. 모험 도중 들른 마을의 주점에 그냥 눌러앉고 싶은 유혹이 밀려오는 것은, 단순히 내 게으름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역시나 세상을 구원하는 일 같은 것은 한 개인에게는 너무나 파격적이고 거창한 일이다. 늘 똑같은 일상을 저주하지만, 막상 그 달콤한 평온함이 깨어지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그것 봐라' 라고 말하며 한 걸음 다가서는 이 불편함... 가끔 마을이 나타나면 다행이지만 보통은 밥 먹듯이 노숙을 해야 하고, 살을 에는 추위와 맞서고, 숨이 멎을 것 같은 사막을 지나야 하고, 심지어는 적이 너무 강한 나머지 경험을 쌓기 위해 지나왔던 곳을 몇 번이나 다시 돌아다녀야 하고... 누군가는 벽 한 쪽에선 난로에 장작이 타오르는 주점에서 오랜 친구들과 한 잔 걸치는 동안, 또 누군가는 세상 어느 한 구석에서 이 세상을 파멸로 몰아가려고하는 세력과 숨가쁜 운명의 일전을 벌이고...
멋진 것도 잠시, 곧 피곤하다... 난 애시당초 그냥 주점에 앉아 있다가 모험 중간에 잠깐 들르는 영웅들을 맞아 그들의 얘기를 흥미진진하게 들어주고 싶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로맨싱사가2

눈 내리는 그 날 밤 내가 모험을 그리워하고 있을 바로 그 때, 그 반대로 나와 같은 평범한 삶을 그리워하면서, 영웅들이 우리집 앞 골목길을 지나쳤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어깨에 걸린 운명을 불평하면서, 따뜻한 음식과 난로를 그리워하면서 말이다...


Kids Run Through the City Corner --- Final Fantasy VI

지금 책장에는 '파이널 판타지 X-2'가 오래 전부터 새로운 나의 모험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지만... 집 떠나면 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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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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