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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0.20 가끔씩 더럽게 일진이 사나운 날이 있다.

오늘 아침에 두 가지 일로 외출 계획을 잡았다. 하나는 독감 예방주사를 맞으러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탁기 먼지망을 사러 가는 것이다. 한 장소에서 두 가지 일을 모두 처리하면 좋겠으나 병원에서 세탁기 소모품을 기대할 수는 없으므로 한 번의 외출로 두 장소를 매끄럽게 연결하여 마치 한붓그리기를 하듯이 동선을 만들어야 했다.

먼저 집을 나서서 옆 동네의 병원까지 걸어가서 주사를 맞고, 병원 앞에 정차하는 마을버스를 타고 불광역 앞에서 내려서 세탁기 소모품을 사고, 거기까지 나간 김에 점심으로 맛있는 것을 사먹고, 다시 마을버스나 지선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오늘의 코스를 위해 지난밤에 포털의 지도까지 펴놓고 동선을 짰다.

그런데 오늘 막상 외출을 해보니 첫단추부터 어긋났다. 아침 시간에 어영부영해서 출발시각이 늦어진 것은 포함시키지 말자. 거기까지 얘길 하면 괴롭다. 아무튼 언덕길을 힘들게 올라서 병원에 도착했더니 점심시간이란다. 뭐라고? 요새 촌스럽게 12시에 점심먹는 병원이 대체 어딨나. 다른 병원 모두 1~2시에 먹는 점심을 여긴 뭐 잘났다고 한 시간 앞당겨 먹는단 말인가. 시립병원이라 다른가? 현재 시각은 12시 5분. 오후 예방접종은 1시부터 접수를 받는단다. 그 얘긴 1시에 접수를 해도 언제 맞을지는 모른단 얘기. 병원 로비에서 1시까지 기다리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래서 작전을 조금 바꿨다. 병원 앞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세탁기 먼지망부터 먼저 사러 가기로 말이다. 물론 돌아오는 길이 좀 번거로워진다. 집으로 바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 그렇지만 아무 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시간을 허비할 순 없다.

병원을 나와 마을버스를 타는 곳까지 내려왔다. 마을버스가 다닌다는 것만 알고 있었지 실제로 이용해본 것은 물론이거니와 본 기억도 없다. 사실은 그동안 지나다니는 걸 설마 한 번도 안 봤으랴만 그런 건 주의깊게 보지 않으면 당연히 모르는 것. 어쨌거나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아 글쎄 이놈의 버스가 올 생각을 않는다. 대체 뭐냐. 왜 안 오는 거야? 속으로 욕을 한 바가지 퍼붓고 나서야, 벽도 아니고 떡볶이 포장마차의 포장에 붙어있는 배차시간표가 눈에 띈다. 이럴수가. 이 마을버스의 배차간격은 45분이다. 세상에 이런 버스도 있구나. 12시 7분에 이미 한 대 지나갔고, 내가 이곳에 도착한 시각은 12시 8분, 지금 시각은 20분이니 앞으로 30분은 더 기다려야 한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다시 병원으로 올라갈까, 아니면 더 기다릴까, 그것도 아니면 큰 길까지 내려가서 다른 버스를 타고 갈까. 잠시 고민 끝에 마지막 안을 선택했다. 지금 다시 병원으로 올라가 봐야 1시까지 기다렸다 접수하는 것 외에는 할 게 없는데, 그렇다고 바로 주사를 맞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잖은가. 여기서 계속 기다리는 것도 체질에 맞지 않는다. 앉을 곳도 없는데 여기서 30분을 기다릴 순 없다. 그리하여 터벅터벅 큰길로 걸어나왔다.

집 근처 버스 정류장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런데 그쪽으로 가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쪽 보다는 반대쪽 정류장이 더 가깝지 않을까?" 내가 미쳤지. 왜 그런 생각을 해 가지고... 아무튼 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바로 방향을 반대로 돌렸는데 한참을 가도 정류장 표지판이 나오지 않는다. 버스 정류장 사이가 원래 이렇게 멀었나... 오늘따라 날은 왜 이렇게 더운지, 얇은 옷을 입고 나갔는데도 머리에서 땀이 비오듯 흐른다. 점퍼를 벗어도 소용없다. 제기랄...

결국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표지판이 뭔가 이상하다. 집근처 정류장엔 여러 버스가 서는데 여긴 달랑 한 번호만 선단다. 왜 그럴까. 알아봤더니 여긴 삼거리라서 우회전 버스는 이쪽 정류장에 서고 나머지 버스는 좀 더 가서, 즉 길 건너에서 선단다. 아 정말 오늘 왜 이러니... 이 정류장에 서는 버스는 불광역으로 가지 않는다. 어쩌란 말이냐. 다시 병원쪽으로 올라가서 마을버스를 기다리라는 거냐. 다 때려치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예방주사고 뭐고 다 필요없다. 빌어먹을 세탁기, 확 갖다버리지 뭐. 덥고 지치고 배고프다. 집에 가서 라면이나 끓여먹어야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억울한(?) 사연을 아내에게 얘기했더니 점심 맛있는 거 먹고 사다 놓은 과자랑 포도 먹고 있으란다. 그래서 라면을 맛있게 끓여먹고 입가심으로 포도를 먹었는데, 이놈의 포도가 절망적이다. 포도에 대한 건 생략. 생각하기도 싫다.

내일 다시 나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심각하게 고민중이다.

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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