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이 보약?

롤플레잉 2006. 1. 30. 23:21

결국 한의원에 갔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아내의 성화에 못이겨 내키지 않는 걸음을 한 것이다.

사실 나로서도 상당한 위기감이 왔다. 근래에는 딱히 이렇다할 이유도 없이 계속 아팠기 때문이다. 찬바람이 약간만 불어도 어김 없이 감기 기운이 찾아왔다. 심지어 집 앞 가게에 다녀와도, 샤워만 해도, 창문만 열어 놓아도, 보일러 전원만 내려도 금새 열이 나고 오한, 두통에 시달리는 것이다. 두통약, 몸살약을 계속 달고 살았다. 마침내 새벽에 몸살과 함께 도적같이 찾아온 속쓰림에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나서야 병원에 갈 마음이 생겼다.

아내랑 나는 살면서 몇몇 부분에 있어 참으로 잘 맞는 부분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말 많은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한의원행은 처음부터 어긋나 버린 면이 없지 않다. 왜 이리 말이 많은 것이냐. 물론 의사 선생은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어 환자를 마음 편하게 하려는 심산이었겠지만, 그런 의도로 내뱉은 농담이 나랑 아내를 처음부터 기분 확 나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덩치가 좋군요. 한 100킬로는 나가겠는 걸~"
      "연예인 닳았다는 소리 못 들었어요? 누구더라~ 아 생각났다. 김제동!"
      '이 인간이 어딜 같다 붙이는 거야... 쩝...'
가뜩이나 불어나는 체중에 예민해져 있는 내게 100킬로라니. 무슨 저주도 아니고... 그리고 누구? 김제동? 길에서 이런 말을 들었으면 드잡이를 놓을 수도 있는 도발 아닌가...

시작이 이러하니 문진이 어찌 되었겠나. 나름대로 의사 선생은 적극적으로 상태를 물었지만 환자가 퉁명스럽고 짧게 딱딱 끊어 대답을 하니 진도가 제대로 나갈 리가 없다.
       "근데 부인이 남편보다 안색이 더 안 좋아... 이렇게 창백한 걸 봐..."
       "예? 그럴리가요. 전 아픈 데 없어요."
       "맞아요. 이 사람이 얼마나 건강한데요."
       "아녜요, 아녜요. 겉으론 건강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그렇지가 않아요. 깡으로 버티고 있는 겁니다."
       "푸훗... 깡으로요?"
건강하기로 자타가 공인하는 아내까지 보약이 필요하다는 얘기에 와서는 부부가 거의 의사 선생을 장사꾼 정도로 취급해 버렸다.
하지만 내가 환자라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과, 오늘 여기서 아무런 소득 없이 일어서면 또 날을 잡아서 다른 병원을 찾아야 한다는 점이, 게으름으로는 하늘이 내린 궁합인 우리 부부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움직여서 결국은 약을 지어서 먹자는 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의사 선생이 내린 나의 상태는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껍데기만 남고 속은 완전히 바닥이 났다는 것이다. 즉 기름 없이 굴러가는 자동차 정도로 비유하면 되겠다. 체력, 기력, 양기 등등 컨텐츠라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안 남아 있단다. 맥도 잘 안 잡히는 수준이라나 뭐라나... 뭐 장황하게 말했지만 결론은 보약 한 재 지어 먹으라는 얘기였다. 물론 의사 선생 본인은 이 처방이 보약이 아니라 치료약이라고 강조했지만 멀쩡한 사람이 아무리 들어 봐도 그걸 지칭하는 우리나라 말은 보약 말고는 없는 듯했다.
       "근데 여기다가 단기간에 효과를 보려면 녹용을 쓰면 좋아요..."
       "아... 그런가요?"
       "녹용을 쓰면 짧은 시간에 몸이 화악~ 올라오지..."
녹용이 부스터나 스팀팩 정도 되는 모양이다.
       "근데 녹용을 쓰면 약값이 좀 올라가지."
       "얼마나 올라가는데요?"
       "녹용 안 쓰면 20만원, 쓰면 한 4~50만원..."
       "!!!..."
대번에 환자 인상이 험해지는 것을 보더니 바로 말이 바뀐다.
       "일반 약재도 효과 좋아요..." 
       "..."

우여곡절 끝에 20만원을 주고 한약을 지어먹었다.
한약은 다 좋은데 먹기가 지랄같다. 입에 써서 힘든 거야 어릴 때 얘기지만, 시간 맞춰서 빼먹지 않고 꾸준히 먹기가 어렵지 않은가... 아무튼 평소 자신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도 대견스러울 정도로 이번 약은 잘 먹었다. 복용시 금하는 음식도 가려 먹고 공복이나 식간을 지키라는 지시사항도 그럭저럭 따랐다.
하늘이 무심하지 않다면 환자의 이 정도 정성에는 뭔가 응답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 응답이 있긴 있다. 그런데 예상치 않은 곳에서의 응답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몸은 별로 나아진 게 없는데 왜 식욕만 마구 올라오느냐는 거다.
하루 세 끼도 모자라서 밤 12시가 다 되어서도 걷잡을 수 없이 밥이 땡긴다. 몸 속에 새생명이 자라는 게 아닌 이상 이럴 수는 없는 거다. 혹시 밥이 보약이라더니 의사 선생이 의도한 것이 이것이란 말인가... 밥 잘먹고 힘 내라고? 설마 진짜로 100킬로로 만들 생각이었나?

'롤플레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머니들의 꿈  (0) 2006.02.04
좋은 엄마 아빠 되기  (0) 2006.02.04
스냅샷  (0) 2006.02.02
담배 연기  (0) 2006.01.31
썩은 물 퍼내기  (0) 2006.01.28
Posted by 도그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