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냅샷

롤플레잉 2006. 2. 2. 09:08
VMware라는 가상 머신은 정말 고마운 프로그램이다. 듀얼부팅을 하지 않고서도 다른 컴퓨팅 환경을 꾸밀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덕분에 따로 부팅을 하지 않아도 윈도우즈와 유닉스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으니...
이 가상 머신의 기능 중에 또 하나 심금을 울리는 멋진 부가 기능이 있으니 바로 스냅샷 기능이다. 쉽게 말하면 윈도우즈의 대기 모드 정도라 할 수 있겠다. 사용자가 원하는 순간을 얼려 두었다가 나중에 다시 필요할 때 녹이는 것이다. 컴퓨터 성능이 좋아지면 질수록, 그리하여 프로그램의 실행 속도가 빨라지면 질수록 인간의 참을성은 더욱 없어지게 마련이니, 부팅을 기다리는 그 시간을 참지 못한다. 그러니 이 기능이 또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가상 머신을 종료하고 싶을 땐 그냥 스냅샷을 찍어 놓고 나중에 다시 실행시키면 그만이다. 아~ 멋지다 VMware...

가끔은 뇌도 이런 기능이 있었으면 좋겠다. 며칠전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이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뒤척이다 잠이 오려는 순간 어떤 생각이 번뜩하고 지나쳐갔다. 대단한 건 아니고 글로 정리해 보고 싶은 주제였다. 짧은 시간 동안 망설였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메모해 놓을 것인가, 아니면 내일 아침에 정리를 할까 하고. 난 나를 잘 안다. 몇 분 전에 놓아두었던 물건도 못 찾는 건망증의 소유자가 내일 아침에 이 주제를 다시 떠올릴 수 있을까. 두말하면 숨가쁘다. 그러나 그 순간 늘 그러하듯 참을 수 없는 귀찮음이 밀려 온다.
'다시 일어나서 불을 켜고 메모지와 펜을 찾는 일련의 행동이 내 양심에 비추어 용서될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아니 멀쩡한 사람이 이런 것 하나도 기억을 못 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많은 걸 기억하라는 게 아니다. 그래 키워드... 내일 아침 이 단어 하나만 기억하자. 단어 하나라니깐...'
당연히 이렇게 아무런 근거 없는 무한한 자기 신뢰와 함께 잠이 들고 말았다. 그 다음날 아침 상태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일어나자마자 패배감에 물들어 있는 남편 얼굴을 보고 아내가 한 마디 안 할 수가 없다.
"무슨 일이야, 아침부터?"
"말시키지 마..."
"왜 그래?"
"아씨~~ 기억이 안 나... 어젯밤에 분명히 몇번을 외고 잤는데..."
"뭔데?"
"몰라... 뭐였는지..."
"종류가 있을 거 아냐... 오늘 해야 되는 일이야?"
"그것도 모르겠어."
"쯔쯔..."
"아 정말... 뭐였지..."

정말이지 이럴 땐 머리 속을 찰칵 찍어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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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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