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하러 나가면 미리 구매 목록을 만들어 가서 짧은 시간 안에 필요한 물건만 후다닥 집어오기로 유명한 우리 가족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오늘 무려 다섯 시간에 걸친 쇼핑을 하고야 말았다. 부처님 오신날이라고 갑자기 날 잡아서 물건을 사러 간 건 아니고, 사흘 연휴를 집에서 뒹굴기만 하는 건 두 딸들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엄마 아빠에게도 결코 반길 만한 상황이 아니다. 그리하여 연휴를 소진하기에 적당한 일을 찾다 보니 이런 쇼핑을 계획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일에 가장 걸림돌은 역시 우리집 막내이다. 외출만 하면 유모차를 거부하고 무조건 엄마가 안고 다녀야만 된다고 주장하는 막내 때문에 한 시간 이상의 쇼핑은 사실상 어렵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때마침 어제 외할아버지께서 손녀딸이 보고 싶으니 데리고 오라고 하셨다. 기회다. 그래서 막내를 오전에 외가에 맡기고 언니와 엄마 아빠, 이렇게 세 식구의 쇼핑이 시작되었다.

우선 은평 이마트 주차장에 차를 대고, 1층으로 올라와서 처음으로 향한 곳은 이마트 매장이 아니라 건물 바깥에 있는 자전거포였다. 작년부터 계속 자전거를 타고 싶다는 큰 딸에게 좀 더 크면 사 주겠노라고 말해 왔지만, 올해 들어서는 더이상 미룰 명분이 서지 않아 지난 어린이날에 사 주려고 했었는데 그 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뒤로 미루고, 드디어 오늘 결행하게 되었다. 이마트 안에도 자전거 매장이 있으나, 어린이날 거기서 워낙 기분 나쁜 일을 당한 터라 다른 곳에 가서 산 것이다. 역시 인간은 경제적 동물이 아님에 틀림없다. 합리적 소비를 따진다면 당연히 이마트에서 사는 게 맞지만, 소비의 주체는 그 외에도 여러 다른 변수를 고려하며, 그 변수 중에는 감정적 요소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

본격적인 쇼핑에 앞서 먼저 자전거를 사러 들렀기 때문에, 자전거를 일단 구입해서 나중에 집에 갈 때 찾기로 하고 자전거포에 맡겨 두고 나왔다. 당장 자전거를 손에 넣을 수 없다는 말에 큰 딸 입이 있는 대로 다 나왔다. 그렇지만 어쩔 수 있나. 투덜거리면서도 엄마 아빠를 따라올 수밖에...

그래도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신기한 물건들을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는 큰 딸. 오늘은 동생을 외가에 맡겨두고 온 터라 서둘지 않아도 된다. 그동안 엄마 아빠를 동생에게 빼았겼다고 생각해온 큰 딸에게 모처럼 엄마 아빠를 독점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애 둘 이상 키우면 가끔은 이런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이런 기회를 갖도록 노력하자.

이마트에 와서 햄버거 안 먹으면 그날은 온 걸로 안 치는 큰 딸이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햄버거 대신 돈까스를 선택했다. 물론 모든 걸 양보한 건 아니고 아이스크림은 언제나처럼 챙겨 먹는다. 젖먹이 없는 외식은 엄마 아빠로서도 오랜만이라 간만에 여유있는 점심 식사가 되었다.

오늘은 목록 없는 쇼핑이라 여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전혀 예상에 없던 지출까지 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 가장 큰 것은 TV다. 드디어 10년 이상 써 왔던 우리집 TV가 현역에서 은퇴할 때가 온 것이다. 다른 걸 사러 가다 우연히 들른 가전제품 매장에서 LCD로 질렀다. 원래는 PDP를 살까 했는데 화질을 비교해 보니까 LCD가 더 끌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꼼꼼하게 따져 보고 살까 하는 마음도 없진 않았으나 그러다가 또 어느 세월에 사겠다 싶어서 그냥 매장 직원 말을 따라 사버렸다.

봄 여름에 입을 옷도 좀 샀다. 큰 딸은 마네킹이 맘에 드는지 자꾸 건드려 본다. 딸 옷도 샀는데, 이젠 좀 컸다고 그런지 자기 옷은 자기가 고르는 큰 딸. 패션에 있어서는 나름 주관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하지만 여유 있는 쇼핑은 또한 엄청난 체력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네 시간이 지나자 다리가 아파서 슬슬 괴로워진다. 마지막에 들른 식품 매장에서는 인내력이 한계에 다다라 아내가 무얼 사자고 해도 시큰둥하게 맘대로 하라고 내뱉도 카트만 밀고 다녔다. 역시 장시간 쇼핑은 체질에 안 맞다.

집에 돌아와서 짐을 부리고 나니 자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이것도 좋은 경험이긴 하지만 되도록 피해가고 싶은 경험이다. 앞으로는 하던 대로 초고속 쇼핑으로 되돌아 가야겠다.

큰 딸은 오늘 산 자전거를 타고 싶은데 내일 월드컵 공원에서 타자는 엄마 아빠 말에 영 상심한 눈치다. 그래서 저녁 먹고 해가 진 후에 집 앞에 나와서 잠깐 맛만 보고 들어왔다. 정말 하루가 길다...

어쨌거나 딸도 엄마도 득템한 하루.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다. 단일 쇼핑으로는 최대의 금액을 지출한 하루이기도 하다. 난 청바지 하나 건졌다. 지금 입고 있는 게 무릎 위가 찢어졌는데 남들은 멋이라고 하지만 난 하루하루 찢어진 부위가 커져가는 걸 지켜보는 게 영 불편하다.

그나저나 내일 월드컵 공원은 어떨지... 연휴 이틀째가 조금 두렵다.

Posted via web from monpetit's posterous

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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