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적 배경은 아마 내가 초등학교 다니는 정도의 나이가 아니었을까 싶다. 당연히 아빠는 출근하셨고, 오늘은 엄마도 아침부터 외출을 하셨다. 집엔 나와 내 동생, 이렇게 둘뿐이었다. 오후 늦도록 엄마는 소식도 없이 돌아오지 않았다.

자꾸 전화벨이 울렸다. 그 때마다 동생이 받았는데 계속 한 사람에게서 전화가 오는지, 그 때마다 대화 내용은 비슷했다. 엄마를 찾나 보다. 엄마는 지금 집에 안 계시다고, 언제 들어오실지 알 수 없다는 말을 동생은 반복했다. 그리고는 매번 수화기 저 편의 사람에게서 메모를 받아 적었다. 엄마에게 전하는 메모였겠지만 그 내용이 궁금하진 않았다.

그런데 이 사람 좀 짜증난다. 엄마가 돌아오시면 전해 드리겠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도 이렇게 계속 전화질을 해 대는 이유는 뭔가. 엄마가 어련히 알아서 돌아오실까 말이다. 다급한 사정이 있을 수도 있지만 애들 둘이 지키고 있는 집에 무슨 공포 분위기 조성하는 것도 아니고 10분이 멀다하고 전화하는 건 예의가 아니잖은가 말이다.

처음엔 별 생각 없었으나 나중에 화가 난 내가 직접 전화를 받았다. 건조한 목소리의 남자다. 여전히 엄마를 찾는다.

"안 계시는데요."
"어쩌지... 그럼 엄마한테 들어오시는 대로 빨리 송금해 좀 달라고 전해줘."
"예. 그러죠."
"그럼 계좌번호 불러줄테니 메모 좀 해 줘."
"예. 말씀하세요."

남자는 계좌번호를 불러준다. '조흥은행 000-00000-0000...' 무심코 받아적다가 메모 내용을 보니 뭔가 이상하다. 번호가 전부 0이라니. 이런 번호도 있나? 아니 정말로 이상한 것은 분명히 상대방은 0이 아닌 다른 번호를 불러주고 있는데, 그것을 받아적는 나는 0으로 적고 있다는 거다. 갑자기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아까 동생이 해 둔 메모를 보았는데,

'농협 00000-000-000000-000'
'국민은행 000-00000-00000-00000'
'부산은행 00000-00000-000-000'

역시 전부 0이다. 머리가 쭈뼛 섰다. 그 순간 수화기 저쪽으로부터 기분 나쁜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웃음 소리를 듣는 순간 온 몸이 마비되면서...



꿈이다. 아내가 놀랐는지 날 깨웠다. 내가 자면서 신음소릴 내더란다.

"또 가위 눌린 거야?"
"아니. 꿈이었어."
"좀 어때?"
"무서워."

어찌나 무서운지 잠이 확 달아났다. 보통은 자다가 가위 눌려서 깨는 경우가 많은데, 지난밤은 특이하게도 악몽만 찾아왔다. 곧 정신을 차리고 아내에게 괜찮다고 말하고 아내를 재웠지만 한 번 깬 잠은 쉽게 다시 들지 않았고, 또 무서움도 금방 떨쳐지지 않았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왜 무서운지 잘 모르겠다는 거다. 뭐가 무섭지? 좀 이상하긴 하지만 흔한 개꿈 아닌가? 그 땐 정말 심각하고 무서웠다는 게 우습다. 아 이런 시시한 꿈이 다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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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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